“바다의 마부” 박연과 하멜 이야기
작성자 : 김재석 조회수 : 303
등록일 : 20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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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c 선원들의 이야기

by 김재석 Feb 17. 2023

   VOC는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의 약칭으로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 회사다. 2년 먼저 창립된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1602년 암스테르담에 설립하였다. VOC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 기업,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VOC 전성기의 2020년 기준 화폐 환산 시가 총액이  9,035조 원이다. 삼성전자 시가 총액이 500조 원, 세계 1위 기업 애플의 3배가 넘는 2,287조 원 규모로 400여 년 전에 벌써 이런 큰 기업이 있었다니 놀랍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깃발

 VOC는 향신료 등 동아시아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자산을 대부분 재투자하였다. 회사 설립 초기 10여 년 동안은 주주들에게 한 푼의 배당도 없었다. 이런 정책으로 VOC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바타비아), 말라카, 스리랑카(콜롬보), 일본 나카사키(데지마), 타이완(젤란디아), 중국(광저우)는 물론  페르시아(에스파한)에까지 세계 곳곳에 20여 개의 상관을 설립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장사꾼 기질은 미래에 대한 통 큰 투자를 이끌었다. 하이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란 말과 같이 그들의 모험적 투자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다.       

17세기 네덜란드 교역소

 

 VOC 설립으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기존 해양 제국을 밀어내고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당시 포르투갈, 프랑스, 스웨덴 등도 비슷한 이름과 성격을 가진 동인도 회사를 세웠지만 네덜란드 VOC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 무렵 VOC가 세계 곳곳에 만든 상관들 중 현대의 국가로 발전한 곳도 있다.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VOC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포르투갈 세력을 쫓아내고 보급항으로 건설한 상관이 모태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 상관은 VOC에 의해 태어난 또 하나의  국가 였다. 암스테르담을 본떠 만든 바타비아는 매우 세련된 계획도시였다. 동인도 회사라는 정치권력은 180여 년이나 이어졌고, 이후 1945년까지 네덜란드 본국의 식민 지배로 연결돼 동인도 회사는 현재 인도네시아 역사의 일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네덜란드는 바다의 마부로 불렸지만 실제로 바다의 말인 배를 몰고 전 세계를 누빈 것은 VOC였다. VOC는 외형은 사기업 형태지만 그 힘은 국가 못지않게 막강하였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완전히 독점하고, 회사 관할 영토 내에서의 사법 및 치안권은 물론, 조약 체결 등 외교권 및 군사 행동권(현지 용병 고용 등)까지 갖고 있었다. 전성기인 1670년대 VOC는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0,000명의 직원과 10,000명 규모의 군대를 거느린 거대 조직이었다. VOC는 사실상 “국가 밖의 국가”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즉 VOC는 우리 역사 와도 관련이 깊다.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Hendrick Hamel)과 벨테브레(J.J.Weltevree, 박연)는 VOC 소속 선원이었다. 하멜은 VOC 명령으로 1653년 1월 14일 스페로우호크 호를 타고 바타비아를 출항하였다.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중 풍랑을 만나 64명의 선원 중 36명이 제주도 모슬포 부근에 표착했다. 제주 관헌에 발견된 이들은 1653년 8월 21일 서귀포 대정에 도착하여 광해군의 귀양 적소였던 부근 목관에 수용되어 10개월 정도 머물렀다. 1654년 7월 26일 그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살았는데 외과의사 아이복켄은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도 낳았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단 앞으로 뛰어들어 부당한 억류 사실을 호소하는 등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 이 사건에 놀란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을 전라도 병영에 3개 집단으로 분산 배치했다. 

 

 하멜은 이 조치로 1663?66년간 여수 좌수영의 내래포에 수용되었다. 1666년 9월 4일 같이 있던 5명의 동료와 순천에 있던 3명 도합 8명이 배를 구입하여 여수에서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9월 13일 일본 VOC 상관의 데지마 섬 반대편에 도착한 이들은 10월 25일 나가사키 당국의 심문을 받았다. 이후 VOC 본부인 인도네시아 바타비아를 거쳐 1668년 7월 20일 고향 네덜란드에 도착하였다. 제주 표착 14년 9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하멜보다 26년 먼저 제주에 표착한 사람이 벨테브레, 조선 이름으로는 박연이다. 벨테브레는 30대 초반인 1627년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제주도에 표착했다. 당시 벨테브레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 소속 사략선(私船) 아우베르케르크 호의 간부급 선원이었다. 사략선(Privateer ship)이란 국가가 사략면장을 발급한 공인된 해적선으로 주로 적국의 선박을 나포하고 대신 그 노획물을 국가와 배분하는 선박들을 말한다. 사략선 선장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해적 드레이크다. 그는 1588년 자신의 사략선 골든 하인드 호를 이끌고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ARMADA)’를 격파한 공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1세로부터 경(Sir) 칭호를 받고 일개 해적에서 대영제국 해군 제독에 오른 인물이다.  

고향 네덜란드 더 레이프(De Rijp)에 세워져 있는 벨테브레의 동상.  조선 무관 복식이 특이하다.               


  벨테브레의 표착 경위를 보면 그가 타고 있던 사략선 아우베르케르크 호는 나포한 중국 상선을 VOC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로 끌고 가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나포선에 옮겨 탔다. 때마침 태풍을 만나 모선 아우베르케르크 호와 떨어져서 표류하다가 식수를 구하려 가까이 보이던 섬에 부하 두 명을 거느리고 상륙했는데 그 섬이 제주도였다. 그때 자신들이 나포한 중국 상선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탈환해 도주해 버리는 바람에 제주도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벨테브레 일행 3명은 오도 가도 못하고 조선 관헌에 붙잡혀 곧바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벨테브레와 떨어진 모함 아우베르케르크 선원들은 포르투갈 해군에 해적으로 붙잡혀 모두 마카오로 끌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당시 흔히 일어나는 사략선 선원들의 운명이었다. 어쩌면 벨테브레가 제주에 난파당하지 않았다면 동료들과 같이 해적으로 처형을 면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벨테브레는 제주도 표착으로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대항해시대 무역선과 해적선의 경계는 모호했다. 망망대해에서 서로 맞다고 드린 상대편 배가 자신보다 무장력이 약해 보이면 상선이 해적선으로 돌변하는 게 그 당시 바다에서는 일상으로 벌어지던 일이었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하멜이 조선에 표류했을 때 벨테브레, 박연이 제주도로 내려와 통역을 맡았다. 하멜 일행은 제주 목사에게 불려 간 자리에서 57~58세가량의 “길고 붉은 턱수염을 한 남자” 박연을 만난다. 붉은 턱수염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특징으로, ‘홍모인’은 그들의 별칭이기도 하다. 하멜 일행은 갓 쓰고 도포 입은 박연이 그들 앞에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제주 목사가 박연이 어느 나라 사람처럼 보이느냐고 물었고, 하멜 일행은 “우리처럼 네덜란드 사람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제주 목사는 크게 웃으며 “그는 코레시안(조선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로 보아 박연에 대한 조선의 응대가 상당히 호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멜이 표류했을 때는 벨테브레가 조선에 온 지 이미 26년이나 지났고 같이 온 동료 2명도 병자호란 때 참전하여 모두 전사했다. 그동안 오랜 세월로 모국어를 잊어서인지 도통 하멜 일행과 말을 나누지 못했다. 이처럼 박연의 네덜란드 말은 처음에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 동안 같이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시 능숙해졌다.   

 

하멜 전시관(제주도)

 하멜 표류기는 또 다른 박연의 모습도 전하고 있다. 박연은 하멜 일행에게 조선에  귀화할 것을 강권한다. 당시 박연은 군사를 훈련하는 관청인 훈련도감에서 홍이포란 대포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고, 병자호란 때는 직접 전투에 나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하멜 일행에게 “우리네는 이방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네. 자네의 의식주는 보장해 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칠 때까지 살도록 하게나.”라고 말했다. 이때 박연이 하멜 일행과 대화 중 ‘우리네’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조선인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박연은 같은 네덜란드 사람인 하멜 일행에게 조선에 영구 귀화할 것을 권한 것이다. 박연이 하멜 등에게 이렇게 귀화를 강권한 것은 자신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당시 조선 조정과 효종의 뜻을 반영한 권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으려 북벌정책을 추진 중이었으므로 박연과 같이 대포 등 화기 제작에 능한 서양인 하멜 일행이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은 하멜과 같은 표착인을 중국을 통하여 송환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그때는 병자호란 직후 명청 교체기의 민감한 외교 문제들이 겹쳐 중국으로 송환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왜관을 통하여 일본으로도 송환을 시도했으나 당시 에도 막부는 하멜 일행이 기리시탄(크리스트교도)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이 하멜 일행 송환을 거부한 것은 그들 일행 표착 16여 년 전인 1637~1638 년간에 일본 규슈에서 기리시탄이라 불리던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시마바라 반란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벨테브레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조선에서 생을 마감했다. 벨테브레는 조선에 오기 전 네덜란드에 부인과 자식 등 가족이 있었다. 1991년경에 소르본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의 한 후손이 박연의 후손을 찾으러 한국에 찾아와 학계와 경찰의 도움을 받아 수소문을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멜은 벨테브레가 표착한 지 26년 지난 1653년 8월, 조선 남서쪽  제주도 인근 해상에 난파하였다. 이 배는 VOC 동양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를 향하던 VOC 소속 상선 스페르워르 호였다. 승무원 대부분이 물에 빠져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조선에 억류되었다. 생존한 승무원 15명은 13년이 지난 후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우리 역사에서 말하는 하멜 제주도 표착 사건이다. 귀국한 하멜은 VOC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체불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 자료로 써낸 게 『하멜 표류기』이다.

 

 1668 네덜란드에서 이 책이 발간되자 곧 큰 반향이 일어났다. 최고 의사 집행기구인 VOC 17인 위원회는 막 건조한 배 이름을 코리아 호로 바꾸고 인도네시아 바타비아로 급히 보내 조선과의 직접 교역을 시도했다. 이 계획은 일본 에도 막부의 반대와 현지 일본 VOC 상관의 부정적 의견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하멜 표류기가 서양인들의 관심을 끈 대표적 사례다. 17세기 대항해시대 바다의 마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 소속 선원으로 제주도에 표착한 벨테브레 박연과 하멜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은 우리 역사에도 이렇게 큰 족적으로 남았다.